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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이해-권용준교수

밀레- 이삭줍기

. 밀레의 <이삭줍기(The gleaners)>(1857년. 캔버스에 유화, 0.83x1.11m. 파리 오르세미술관)


(A) ‘농부의 아들’ 밀레


밀레(François Millet. 1814-1875) 역시 코로와 더불어 자연 즉 시골의 아름다운 경관을 화폭에 담으려고 했던 화가로, <이삭줍기>나 <만종> 등의 그림으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람이다. 밀레가 작품의 주된 소재로 삼은 것이 바르비종의 아름답고 소박한 전원과 자연의 모습, 그리고 욕심 없는 농부들의 진솔한 노동과 그 가치였다. 그는 스스로를 ‘농부의 아들’로 자처했다. 이는 시골 풍경과 그와 더불어 사는 인간의 모습을 자신의 회화가 지닌 목표라는 것을 말한 것이며,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한 이 약속을 지키며 살았던 화가이다.


(B) 작품 구성

 

* 작품 제시 : 05. 밀레의 <이삭줍기>


<이삭줍기>가 그려진 때는 1857년이다. 이 시기는 1848년에 있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선언> 이후 유럽의 많은 나라가 혁명 등 정치적 ․ 사회적 격변기를 맞이했던 때이다. 특히 이런 와중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간의 계급 갈등이 생겨났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가난한 농부와 힘든 노동을 그린 밀레의 작품이 노동자계급을 대변하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게 된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소박한 자연과 그 자연과 함께 하는 노동의 신성함을 그리려는 밀레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평가였던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레는 타의에 의해 프랑스 최초의 ‘민중 예술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그림의 원경에는 대기 원근법에 의해 작고 희미하지만 층층이 쌓인 수확된 밀집들이 표현되어있다. 그리고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들은 소작인이든지 아니면 헐값에 노동력을 파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을 탄 사람의 감독과 지시에 의해 그 밀집들을 마차에 실어 좌측 원경에 표현된 창고로 옮기고 있다. 이른바 이 원경은 자본가와 노동자 즉 빈과 부의 차이라는 사회의 불평등적 생산 양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부의 격차를 단박에 인식하지 못한다. 이유는 이들의 노동과 행위가 너무도 광활한 대지 즉 자연의 이미지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원경의 모습을 세밀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반면, 우리의 시선은 상대적으로 커다랗게 그려진 전경의 세 여인에 머물게 된다. 이 여인들의 몰골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힘든 생활을 하는 사람들인지를 알 수 있다. 이들은 이미 수확이 끝난 뒤 우연히 떨어진 밀알을 주워서 연명하는 자들로, 원경에 보이는 노동의 댓가를 받는 사람들의 그룹에서조차 소외되어 있다. 밀알을 줍는 이들의 투박한 손의 모습을 보라. 평생을 노동으로 일관한 자들의 손 아닌가? 당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두려움을 느꼈던 부르주아들은 이 손을 밀알이 아닌 ‘폭탄을 줍는 손’이라고 이야기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리고 두건 아래에 드러난 여인 얼굴의 그을림이 역시 이들의 고단한 삶과 힘든 노동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세 여인의 휴식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휴식을 모르는 노동 말이다. 지금 이 세 여인은 허리가 아픈 것도 잊은 채 밀알을 줍고 있는 것이다. 우측에 있는 여인은 잠시 순간적으로 허리를 펴고 쉬고 있다. 가운데 여인은 노동에 여념이 없고 좌측의 여인은 노동을 하면서 잠시 왼팔을 등에 대고서 아픈 허리를 순간적으로 달래는 형상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그림을 통해 노동에 대한 어떤 부정적 이미지를 보지 못한다. 묵묵히 일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자연과 운명에 순응하며 살려는 인간의 소박한 의지를 볼뿐이다. 바로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솔직하고 소박한 인간의 참모습 말이다. 그러나 이름도 얼굴도 명확하지 않은 이런 익명의 인물들이 사실은 우리 역사의 주인공 아닌가? 어쩌면 밀레는 이런 계층의 사람들이 세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소박한 자연과 함께 한 인간의 노동을 통해 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