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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이해-권용준교수

계몽주의 - 샤르댕

 *  계몽주의란 ?

 18세기 서구 특히 루이 15세와 루이 16세 시절 프랑스를 풍미한 로코코 경향은 귀족들의 화려한 미적 취향 즉 이들의 애정과 풍류 등을 다루고 있다. 이들의 이런 사치스러운 유희는 결국 서민들의 피와 땀이 서린 고통을 전제로 한 것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역사는 순환하는가? 이제 그 고통의 피와 땀이 예술 역사의 전면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1789년 7월 14일 파리.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 파리에서 발생한다. 바로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이다. 성난 민중들, 무지몽매한 시민들이 스스로 국가의 주인임을 천명하면서 자신들의 굶주림과 고통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왕과 귀족을 향해 돌을 던진 것이다.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이 혁명의 정신적 근거를 제공한 것이 계몽주의이다. ‘계몽’이라는 말이 개화와 각성을 의미하듯, 계몽주의란 일반 서민들에게 주체성을 확립시킨 사상이다. 이 시민정신을 고취시킨 사상의 중심에는 디드로, 루소, 볼테르 등이 있었다.

 

바로 이 시대에 부셰나 프라고나르 등 타락한 귀족 풍류를 예술의 주된 소재로 삼았던 로코코 화가들과는 달리, 귀족에 의해 억압받는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정서를 화폭에 표현한 화가들이 있었으니 바로 계몽주의 예술가들이다.

 

이 예술가들은 평범한 서민들의 삶의 양상과 더불어 이들이 그 삶 속에서 겪는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는데, 궁극적으로는 이런 사실을 통해 진실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평범한 일상의 인간 모습에서 진정한 휴머니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런 계몽주의 화가들의 의도와 경향은 로코코 예술가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2) 샤르댕의 <장을 보아온 여인>(1739년. 캔버스에 유화, 47 x 37.5cm. 루브르 박물관)

 

   샤르댕이 일반 서민의 서정적 삶과 인간 내면의 은밀한 감정을 그린 대표적인 작품이 <장을 보아온 여인>이다. 일견 이 그림은 장에서 막 돌아온 여인을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녀의 손에는 음식 재료로 가득한 장바구니 같은 헝겊주머니가 들려있다. 가장 아름다운 여체를 표현하는 S자 곡선의 그녀는 결코 화려하지는 않으나 외출을 위해 나름대로 잘 차려입은 모습이다. 그녀의 견고하게 보이는 신발, 소매를 걷어 올려 묶은 끈, 머리에 쓴 모자가 결코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일상의 노동에 유리한 실용적으로 보인다. 이런 모습에서 이 여인이 매일의 삶에 얼마나 성실한 태도를 보이는지를 감지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여인의 공간인 부엌은 치장하고 꾸미지 않아 결코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 안의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이런 공간 모습은 소박하고 검소한 그녀의 내면세계를 암시하는 듯하다. 찬장 위에는 세심하게 표현된 커다란 빵이 두 개 놓여있다. 이 빵은 그녀가 가족들을 위해 마련한 것으로, 정성껏 감싸고 있는 모습에서 식구들에게 쏟는 그녀의 따뜻한 애정과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다. 투박하지만 견고하고 깔끔한 찬장과 그 위에 가지런하게 정돈된 쟁반과 깨끗한 물병이 이 여인이 가족들을 위해 쏟는 사랑의 헌신과 노력을 보여준다. 특히 흔히 잃어버리기 십상인 찬장의 열쇠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상생활에 빈틈없는 여인의 성격을 대변하고 있다. 물론 바닥의 쓰러진 물병이 서민의 부엌이 결코 이렇게 질서정연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여인은 장에서 돌아와 그 고단함에도 여전히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있다. 즉 이 순간이 그녀에게는 결코 노동 후의 휴식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인가? 그 해답은 그림 속 인물들의 관계에 나타나있다.

 

  이 그림 속에는 세 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부엌 밖의 공간을 잘 보라. 그곳에 한 여인이 있는데, 그 여인은 출입문을 열고 얼굴을 내민 콧수염의 남성과 대면하고는 안으로 발을 들이고 있다. 그 여인은 잘 차려입은 모양이 남자의 초대를 받은 모양이다. 바로 장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는 휴식의 시간을 기대하면서 돌아오던 주인공이 이들의 만남을 목격한 것이다. 순간, 그녀는 육체의 피로도 잃고 자신의 존재를 이들에게 들킬까 무서워 부랴부랴 그녀의 부엌으로 찾아든 것이다. 왜 그랬을까?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아서일까? 아마도 그녀가 내심 이 이웃집 남자를 마음에 두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질투라는 묘한 녀석이 은근 슬쩍 그녀의 마음에서 피어올라 피곤한 자신을 망각하게 한 것은 아닌가? 아마도 이 순간 그들을 목격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부끄러워 자신도 모르게 얼른 자기 집으로 발길을 옮긴 것이다. 그러고는 자신의 공간에서 남 몰래 은밀히 두 남녀의 행위에 귀추를 주목하고 있다. 이처럼 정신이 온통 딴 곳에 팔렸으니 바구니의 무게가 무슨 대수랴.

 

  이 주인공 여인에게는 남편과 자식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은 애써 부정하지만 한 남자를 살며시 마음에 두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다만 그 흠모의 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행동으로 옮겨진다면 인륜의 덕을 저버린 추한 행위일 테지만, 이 여인은 스스로를 절제하고 통제하여 자신만의 은밀한 감정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순간 감추어야 할 그 연모의 정을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에게 들켰다는 부끄러움에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 은밀한 정에 들뜬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샤르댕은 이렇듯 서민들의 삶의 모습만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일상에서 겪는 미묘한 감정까지도 표현한 것이다. 바로 이 감정의 표현으로 말미암아 샤르댕의 그림은 서민 삶이 박제화 된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생명으로 가득한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 감정은 당시 허영과 사치에 들뜬 귀족들이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샤르댕의 붓을 통해 서민들의 주체성으로 꽃핀 것이다. 바로 이 감정은 당시 귀족들이 보인 경박하고 노골적인 연애행각과는 달리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지극히 소박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내면 감정인 것이다. 그 들뜨지 않은 은밀한 내면성은 여인이 입고 있는 화려하지 않고 조용한 색조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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