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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이해-권용준교수

미술과 에로티시즘 2

                         앙트완 바토(A. Watteau)의 <키테라 섬의 순례>

                    (1717년. 캔버스 위에 유채, 129 x 194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1. 그림의 유래

 <키테라 섬의 순례>는 당시의 희극 작가 당쿠르가 쓴 작품 「세 사촌자매」의 첫 구절 ‘우리와 함께 키테라 섬에 순례하러 갑시다. 젊은 처녀들은 애인을 얻어 돌아옵니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벌써 인간 본능을 향유하는 유희적 정조가 물씬 풍기지 않는가? 우선 이 그림에 나타난 장소는 키테라 섬 즉 미의 여신 비너스의 섬이다. 그림 우측의 사랑의 숲에는 그 상징으로 여신의 동상이 있어, 사랑을 갈구하는 자들이 바친 장미꽃과 검들이 걸려 있다. 

 

                                                    <키테라섬(부분)_비너스>

 장미는 비너스의 꽃으로 유희적 사랑을 의미하며, 검은 전쟁이며 명예이자 지혜를 말한다. 이것들이 비너스 동상에 걸려 내동댕이쳐진 것은 숭고한 이성적 사유가 사랑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시사하는 것이다.

 

2. 그림 읽기

이 그림의 원경에는 감미로운 색채의 하늘을 날고 있는 어린 천사들이 보인다.  

 

< 키테라섬(부분)_어린천사>

  이 천사들은 비너스의 아들로 사랑의 신인 큐피드의 화신 즉 푸토(Putto)들로, 인간에게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전하는 자이다.


그림의 좌측에는 이 섬에 막 도착한 한 척의 배와 일군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 남녀는 사랑을 구하기 위해 다양한 몸짓으로 서로를 희롱하고 흥정을 하는 모습이다.   

                                         < 키테라섬(부분)_좌측부분 뱃사공과 흥정>

 마치 사랑을 약속하고는 즐거운 향락의 세계를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을 향락의 장소로 인도한 뱃사공마저 배에 서서 이 흥정과 희롱을 거들고 있다.


그림 중앙에는 세 쌍의 남녀가 보인다. 이들은 이미 애인을 구하고 달콤한 사랑의 한나절을 보낸 사람들이다.  

                                                < 키테라섬(부분)_세쌍의 남녀>

 

이들 중 한 쌍은 그만 돌아가자는 동료의 보챔에 아랑곳 하지 않고 연애삼매경에 빠져 있다. 귀족의 위엄과 명예의 상징인 지팡이가 내동댕이쳐진 것으로 보아 이들은 진한 사랑의 달콤함에 넋이 빠져 있다. 숭고한 사유에 대한 사랑의 압도적인 승리이다. 그 옆의 내숭떠는듯한 여인은 적극적인 사랑의 고백에 부채로 은밀한 화답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당시 여인들이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부채 등 몸짓으로 응수했던 연애문화를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그림을 보는 순간 감각적 사랑의 감미로움과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러한 사랑을 유희하지 않을 자가 누구이며 그 달콤한 향락에 도취되지 않은 자가 누구이겠는가? 이처럼 이 그림에는 ‘영혼의 순화’를 목적으로 한 인간의 고결하고 숭고한 사유 대신 달콤한 사랑의 찬가가 존재할 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바토의 화풍을 ‘페트 갈랑트(Fête galante)’ 즉 ‘달콤한 축제’라고 부른다.


3. 바니타스(Vanitas) : 사랑의 찬가 이면의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교훈

 그러나 바토는 이런 경박한 사랑의 행위를 찬양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형상과 색의 이미지를 통해 인간들의 감각적 사랑과 일시적 허영이 얼마나 덧없는 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선 이 그림 우측의 세 쌍을 인도하는 존재가 귀여운 강아지이다.


* 그림 제시 : <키테라섬(부분)-강아지>

 이 강아지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로 이들 앞에서 꼬리를 살랑거리며 이들의 경박한 사랑을 인도하고 있다. 즉 이들의 사랑이 유희와 쾌락을 향한 인간 본능에 의한 것임을 강아지로 표현한 것이다. 바로 이성적 사유를 기대할 수 없는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강아지가 대변하는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닌 감각적 사랑이며 결국 유희에 눈 어두운 방종이라는 것을 경고하는 것은 아닌가?


또한 세 쌍의 그룹에서 우측 여인의 끝자락에 바지를 벗고 이들을 빤히 바라보는 어린아이가 있다.


* 그림 제시 : 바토의 <키테라 섬의 순례>


이른바 오줌싸개 철부지 바보다. 그러나 이 바보가 세상을 바라보는 가장 순수한 눈을 가지지 않았을까? 그 맑고 순수함이 세상사의 허영과 가식에 물들지 않아 바지를 벗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아이가 이 연인들의 작태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른바 이들의 부질없는 행동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의 존재로 의식하지 못하고 어떤 수치심도 느끼지 못한다. 다르게는 남녀의 사랑이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이런 생명의 탄생을 전제로 한 행위여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림 좌측의 배를 몰고 온 뱃사공 즉 사랑의 전령사들의 모습을 보자.


* 그림 제시 : <키테라섬(부분)_뱃사공과 흥정>

이들의 얼굴은 아무 표정도 없는 해골모습을 하고 있다. 이른바 ‘메멘토 모리’ 즉 죽음 앞에서 인간의 향락과 사치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림 우측 하단에 검은 색으로 묘사된 썩은 나무들 역시 죽음이라는 감각적 사랑의 종말을, 아니 죽음 앞에서 이런 사랑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를 반문하고 있지는 않은가?


* 그림 제시 : 바토의 <키테라 섬의 순례>

 반면 그림의 우측 이들의 천박한 행위 앞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나무는 진실과 이성 그리고 도덕을 의미한다. 비록 어둠의 침묵에 있지만, 그 크기와 풍성함이 이성과 도덕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이 바토는 이 그림에서 형식적으로는 감미롭고 육감적인 사랑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듯하나, 실제는 진실하지 못한 사랑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토의 순수하고 감각적인 화풍, 화려한 색채와 빛을 비롯한 가시적 주제라는 형식미만을 로코코 화가들이 도입하면서 18세기의 육감적 예술을 이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