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술의 이해-권용준교수

낭만주의 - 고야<1808년 5월 3일의 학살>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학살>(1814년, 캔버스에 유화, 266 x 345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1808년, 나폴레옹은 막강한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을 침략, 지배하에 들어간다.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이들 군대가 부패한 왕정을 쇄신시킬 것이라는 희망에서 이들을 반겼으나, 프랑스군들의 행위는 이와 전혀 달리 야만적 행위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프란시스 고야(Francis Goya. 1746~1828)는 18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이며 서구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스페인의 화가이다. 낭만주의란 인간의 감성적 인식과 느낌을 아무런 제재 없이 그대로 묘사하는 예술 경향으로, 주로 인간의 애틋한 사랑에서부터 전쟁과 학살에 이르는 ‘상식’의 범주를 넘나드는 인간의 행위를 주제로 삼는다. 고야는 나폴레옹 군대가 자국민들에게 저지른 동물적 만행을 이런 낭만주의의 필치를 통해 고발하고 있는데, 그 참상을 기록한 대표작이 바로 <1808년 5월 3일의 학살>이다.

 

프란시스 고야, <1808년 5월 3일의 학살>.1814년, 캔버스에 유화, 266 x 345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즉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시민들은 봉기를 일으켜 나폴레옹 군대에 대항하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은 그 다음날 반란자들을 비롯해 많은 구경꾼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한다. 이 그림이 이 때 프랑스군이 자행한 야만적인 대량 학살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지금 죽어야 하는 운명의 자들은 대부분 당시 광장의 단순 구경꾼들이다. 주로 힘없는 늙은이나 병약자, 어린이들 말이다. 정말 아무런 대가도 가치도 없는 무고한 희생이다.


이 그림을 보면 등을 돌린 몇몇 병사가 총부리를 겨누고는 무수히 많은 무고한 양민들에게 죽임을 가하고 있다. 처형하는 자들의 무감각함과 처형당하는 자들의 무서움에 질린 공포가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등을 돌린 채 마치 해충처럼 서로 얽혀 처형을 감행하는 자들이 나폴레옹 군으로 이른바 살인기계들이다. 이들은 긴 칼로 무장하고 가죽 코트에 침낭을 매고 있으며 자신들의 총에 날카로운 단검을 장착해 자신들의 무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무자비한 맹목적 행위가 어떤 심판을 받을 것인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살인을 반성 없는 일종의 유희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들의 행위가 얼마나 명분이 없으면 부끄러움으로 얼굴조차 드러내지 못한단 말인가. 이른바 이름 없는 존재가 역사에 가하는 익명성의 무책임한 상처요 오점이다.

 

이들의 총부리에 죽임을 당하는 자들은 그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하는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존재들이다. 현재 시각 새벽 4시. 칠흑의 어둠 속에서 이미 죽임을 당한 자들이 얼마인가? 그리고 앞으로도 죽어야할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어둠을 가로 지른 긴 행렬이 보여주고 있다.


이런 부질없는 죽음을 가로 막을 수 있는 희망의 상징은 교회와 정부이다. 그림의 어둠 속에 희미한 관청과 교회는 바로 리리아 궁전이며 산 조아킨 수도원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기는커녕 짙은 어둠 속에서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회화에 있어 이런 거역할 수 절대 악, 그 운명 앞에서 나타나는 희망의 상징은 빛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그 빛조차 랜턴 빛이다. 이 빛은 하느님의 창조적인 빛이 아니라 인공적인 빛으로, 오히려 학살을 자행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아무런 희망의 줄기도 보이지 않는 지극히 암울한 순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랜턴 빛에 반사된 얼굴에 우리의 시선이 고정된다. 놀람, 경악, 공포의 얼굴. 두 팔을 크게 벌린 채 알지 못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의 순진한 큰 눈망울과 죽음을 앞둔 두려운 시선이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그 옆, 머리 모양으로 보아 성 프란체스코회의 수사임에 틀림없는 자가 이 죽음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를 절규하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마치 <하느님, 도대체 어디에 계시나이까? 지금 이들은 왜 죽어야 합니까?>라고 따져 묻는 것 같다. 인간은 과연 얼마만큼 잔인할 수 있는가? 이런 죽음을 위해 우리는 이 세상에 왔는가? 어떻게 해야만 인간은 그 본성을 회복할 것인가?


그러나 이 죽음은 결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두 팔을 크게 벌린 인물의 손바닥을 보라. 움푹 팬 것이 못 자국이 분명하다. 이는 벌린 두 팔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된 그리스도를 연상케 하며, 아래에 이미 피를 흘리며 엎어진 시신 역시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된 듯 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바로 ‘근대의 십자가 처형’이다.

 

따라서 이 무자비한 학살의 희생자와 그리스도의 처형 간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는 것 같다.

 

 

고야는 이 야만적인 인간 행위의 악과 패덕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인간 자신에게 전혀 기대할 수 없음을, 오히려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내가 행하는 지금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길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가?


이런 죽음을 맞은 이름 없는 무고한 자들은 실제 독재와 인간의 야만성에 항거한 사람들로, 따뜻한 인정과 평화로 건설된 세상의 밑거름이 된 영웅적 희생자임을 이 그림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잔인하고 야만적인 행위 앞에서 인간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실천한 그리스도의 의미를 되찾자는 고야의 고매한 이상이 그림 속에 보이지 않는가?